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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성범죄 싫으면 슬럿처럼 입지 말라"는 경찰, 왜 문제인가?

노출을 줄이면 성범죄가 줄어들까? 통계는 다르게 말한다 에서 자체 트랙백

어제 윗글을 작성했는데, 여러 블로거 분들이 댓글로 논의에 참여해 주셨다. 그 중 의미 있는 논점을 포함하고 있는 댓글이 있어 별도의 글을 올린다. 원래는 댓글로 달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분량이 길어져서 독립적인 포스트로 가져가는 게 나은 것 같다.

???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시는 분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분량이 약간 있긴 하지만 일단 그의 댓글 전문을 인용하며 시작해 보자.


??? 2011/07/22 00:58
이건 그다지 sonnet님 글에 대한 반박 증거가 아닌것 같은데요.

물론 여성의 옷차림과 성범죄간에 유의미한 관련이 없을수도 있습니다. 성범죄자가 딱히 '야한' 여성을 노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죠. 그러나.....

직관적으로 생각해볼때, 수수하게 입은 여성과 야하게 입은 여성,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보다 성적 매력이 높은 여성과 낮은 여성이 있습니다. 다른 조건이 다 같다고 쳤을때 성범죄자는 과연 누굴 노릴까요? 성폭력의 본질이 성욕이 아니므로 아무나 랜덤하게 찍을까요? 아니면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쪽에 덤빌까요?

여성의 옷차림이 야하지 않게, 심지어 부르카를 쓰고 다닌다해도 딱히 성범죄 자체가 줄지는 않겠지만, 내가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것은 최소한 그 대상이 내가 아니게 만들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거 하나 믿고 살기엔 세상이 험난하지만, 적어도 신경써야할 많은 요소중에 하나일수는 있죠. sonnet님의 표현에 따르면 대증요법적 대책인 셈입니다.

이에 대해 주인장께서 드신 근거는 성범죄 전체와 관련된 것으로 이것은 치안의 영역이지 개인 대증요법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건 여성의 옷차림을 개선(개악?)하여 성범죄를 박멸하자는 얘기가 아니고, 성범죄자의 타겟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자는 얘기니까요. 내가 집에 자물쇠를 채우고 철저히 문단속을 한다고 해서 세상에 도둑이 줄어들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문을 열어제치고 다닐 이유는 없는것이 아닙니까. 사회적인 범죄 대책과 개인의 대책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일단 주장에 내적 모순이 있다

나는 일단 ???이 제시하는 핵심 주장이 뭔지 혼란스럽다. ???는 글의 앞부분에서는 ①"여성의 옷차림과 성범죄 간에는 유의미한 관련이 없다"는 필자의 주장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으면서도(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뒷부분에선 ②피해여성의 다른 조건이 다 같다고 쳤을 때, 강간범은 더 야하게 입은 여성에게 '덤빌' 것이라고 주장한다.

①과 ②는 모순되는 관계다. ①을 인정한다면 ②는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①자체가 이미 '다른 변수들이 같을 경우'를 가정으로 깔고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회과학적 명제라는 게 다 그런 거다. 다른 변수를 통제했을때 OOO한 경향이 있다는 것. 만일 ②가 타당한 주장이라면, 애초에 ①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 내 의견에 반박을 하고 싶다면 우선 ① 자체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반론을 펼치는 전략을 택하는 게 낫다고 본다. 지금 같은 논리전개 방식은 좀 이상하다.


2. 논쟁에 대한 성실성을 보여달라

그러나 일단 이 모순을 무시하고, 그가 원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①을 일단 무시하고, ②가 ???의 본질적 논지라 가정하고 논의해 보자는 거다. (???이 ②를 강조하고 있으니 부당한 가정은 아닐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는 피해여성의 다른 조건이 다 같다고 쳤을 때, 강간범은 더 야하게 입은 여성에게 '덤빌'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라는 게 좀 희한하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 답변은 "그건 님의 직관일 뿐" 되겠다.

웹서핑만 조금 해 봐도, 다른 가설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강간범이 피해자를 고르는 방식은 랜덤일 수도 있고, 범행 성공률이 높은(육체적으로 왜소하고 빈약해 보이는) 여성을 찍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개인의 매우 독특한 취향(fetish)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럼 무엇이 가장 강력한 요인일까? 그건 전적으로 주장을 제시하는 측이 입증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그 입증에 있어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인의 직관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필자와 ???의 직관은 다른 것 같다)

즉, 옷차림이 피해자(타겟)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근거(연구자료든 논문이든)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 없이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 한마디만 근거로 삼으려는 건 논쟁에 있어 기본적인 성실성이 결여된 태도다. 직관과 직관끼리만 부딪혀봐야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기독교 신자와 불교 신자가 신앙싸움만 하다가 대화를 포기하는 길을 밟을 뿐이다. 제대로 된 소통(혹은 논쟁)을 원한다면, 상대방이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건 무슨 주장을 하는 자의 최소한의 책무다.

필자는 이미 ①을 주장하는 지난 포스트에서 계절별 통계를 근거로 제시했다. ???가 필자를 반박하고 싶다면,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주길 기대한다.


3. 슬럿워크 촉발 멘트, 발언자가 '경찰'이라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기 위해 포스팅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는 나의 주장이 성범죄 전체와 관련된 것으로 이것은 치안의 영역이지 개인 대증요법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아마도 옷차림이 전체 성범죄 규모와는 상관이 없지만, 구체적인 피해자가 누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데에는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 같다. 나는 이 견해 자체에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그게 아니다. ???의 견해가 맞든 틀리든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공공정책을 다루는 입장에서라면 그렇다.

여기서 잠깐, 슬럿워크를 촉발시킨 문제의 사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성폭행을 막기 위해서는 헤픈 여자(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의 당사자는 무려 '경찰'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딸보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경찰이라는 관료조직의 공무원이 국민을 상대로 한 발언이라는 거다.

이건 엄청난 뻘짓이다. ???도 동의(?)하고 있듯이, 여성의 옷차림과 전체 성범죄 규모에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율 감소를 목적으로 하는 치안조직의 입장에서라면, 이 명제가 논증되는 순간 이야기 다 끝난 거다. 설령 "옷을 조신하게 입고 다니면 성범죄자의 타겟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는 ???와 경찰관의 주장이 옳다고 쳐도, 그건 경찰이 성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하는 건 부적절하다. 어떤 여성이 경찰의 말을 듣고 덜 야한 옷차림을 하더라도, 강간범은 그녀보다 좀 더 야하게 입은 타겟으로 이동해 범죄를 저지를 게다. 어차피 일어나는 강간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거다. 우리가 이런 정도의 변화를 만들라고 경찰들 월급을 주는 걸까?

비슷한 예를 들어보자. 현재 한국에 청년실업이 심각한 문제라, 국민(혹은 미디어)가 재경부 관료 A를 모셔놓고 실업대책을 물었다고 하자. 근데 이 공무원 A가 "대학생 여러분 취업을 하고 싶으시면요, 학교에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더 나은 스펙을 쌓으세요."라고 답변했다고 치자. 아마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물론 A의 말 자체는 옳은 구석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어떤 대학생이 열심히 학점따고 스펙을 쌓아 취직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대신 다른 누군가는 떨어지게 돼 있다. 일자리 수 자체를 늘리지 않으면 말이다. 따라서 사회전체적으로는 변화가 없다. 이런 걸 대책이라고 제시하는 공무원은 심각하게 무능한 거다. 요컨대, ???이 말하는 '개인적 대증요법'을 제시하는 건 정부 관료들의 역할이 전혀 아니다. 부모나 본인이라면 모를까. 만일 필자가 정부의 수장이라면, A같은 무능한 공무원은 당장 해고할 것이다.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정리하자. 문제의 캐나다 경찰관은 정부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에, "성범죄를 막으려면 헤픈 여자(slut)처럼 입고 다니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안 됐다. 그건 사회 전체 차원에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공공정책으로 매우 쓸모없는 처방이었다. 그 경찰은 대신 이렇게 말해야 했다. "성범죄를 막기 위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행동변화에 초점을 맞춘 정책들을 추진하겠습니다", "전자발찌가 됐든, 성범죄자 정신치료가 됐든, 성범죄 양형 증가가 됐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각주1>

우리가 정부에 기대하는 역할은 그런 것이다. 잔소리는 엄마에게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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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여기서 제시하는 방안들에 필자가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필자는 범죄정책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며, 따라서 어떤 정책이 사회적으로 적합한지를 판단할 만한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었을 뿐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