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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성추행 의대생은 변호받을 권리도 없는가 - 황진미 비판(1)

<들어가기 전에>

피해자 사생활 벗기려는 성추행 법정

본고는 한겨레 온라인판에 메인 기사(위 링크 참조)로 올라온 '법정르포'에 대한 비판이다. 해당 르포를 소개하자면, 페미니스트 영화평론가로 알려진 황진미가 소위 '고대 의대생 성추행'으로 알려진 사건의 공판에 참석해 남긴 기록물로서, 공판과정을 묘사하고 나름의 논평을 덧붙인 서술이라 하겠다.

황진미가 르포를 통해 제기하는 주된 논점은 다음 두 가지로 추릴 수 있다. ①성추행범을 변호하는 행위는 잘못됐다 ②고대 의대 성추행 사건의 공판과정은 피해자의 사생활을 부당하게 '벗기고' 있기에 문제가 있다.

필자는 가해자들의 성추행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유죄가 확정된다면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황진미의 두가지 견해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②는 한국 여성학계의 성폭력 담론이 제기하는 사법체계 비판의 수준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확인해 주는 교과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해당 업계(?)에 나름 애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오류를 방치하는 것은 업계의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굳이 시간을 할애해 포스팅을 하는 이유다.

비판은 분량을 고려해 2개의 글로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①에 대한 비판이며, ②에 대한 비판은 나중에 별도로 포스팅하기로 하겠다.


<본문>

일단 황진미의 글부터 살펴보자.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호화 변호인단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이 사건에 처음엔 피고인 박씨, 한씨에 대한 변호인으로 유명 로펌의 변호사 3명이 선임됐다. 배씨의 변호인으로는 개인변호사 2명에 2개 유명 로펌 소속의 5명의 변호사로 무려 7명의 변호사가 선임됐다. 20대 학생신분의 피고인들에게 총 10명의 변호인단이 꾸려졌으니, ‘반성은커녕 돈지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여론의 질타를 의식하였는지 박씨, 한씨의 변호를 맡은 3명이 모두 사임하였다. 배씨의 변호인 7명 중 4명도 사임하여 3명만 남았다. 박씨, 한씨는 잠시 국선변호인을 선임했다가 다시 새 변호사를 1명씩을 선임했고, 이들이 법정에 출석하였다. 배씨의 변호인 3명 중 법정에는 1명만 출석했다.

그런데 이 변호사의 낯이 익다. 2009년 촛불집회 재판 당시, 야간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개념판사였고, 이후 신영철 대법관의 핍박을 받아 스스로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었다는 박재영 변호사다. 이분을 집단성추행사건 변호인으로 법정에서 뵙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최근에는 부산저축은행 변호인으로도 이름을 올렸다니,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정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저 판사일 때와 변호사일 때에 따라,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사명에 투철한 법조인으로 이해하면 되는 걸까.

- 피해자 사생활 벗기려는 성추행 법정. 2011년 7월 23일. 한겨레 온라인판


일반적인 형사사건과 비교했을 때,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의 독특한 특징은 피의자가 수임한 변호사들의 상당수가 '여론'의 압박을 받고 사임했다는 점이다. 일단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 중 일부의 명단과 이력이 익명으로나마 언론을 통해 공개됐으며[각주1], 이들이 누구인지는 소위 '네티즌 수사대'의 추적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밝혀졌고, 트위터 등을 통해 해당 변호사들에 대한 성토 여론이 확산됐다.

그러자 변호사들은 사건수임을 포기하는 것으로 '논란'에 대응했다. 예컨대 내년 총선에서 정계복귀를 노린다고 알려진 신기남 변호사(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경우, 사건수임 사실이 알려지자 "로펌의 변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무단 도용했다"며 변호인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아마 변호를 계속하면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게다. 신씨 뿐만 아니라, 고대 성추행 의대생 3명의 변호를 맡기로 했던 변호사 13명 중 중 10명이 사임했다. 변호사들의 입장에서 사임은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수임료 몇 푼 벌자고 신문지상에 자기 이름이 부정적으로 나가게 해 사회적 평판을 깎이는 것보다, 그냥 수임 취소하고 다른 사건 맡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위 '여론'이라 불리는 특정한 집단적 견해가 변호사의 의뢰인 선택에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과연 긍정적인 현상이냐는 데 있다. 고대 성추행 사건은 이 '압력'이 형사사건 피의자들의 변호인 선임의 폭을 제한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힘이 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특별한 사회적 반전의 계기가 없는 한, 이런 경향은 당분간 다른 사건에서도 계속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관심을 받는 사건에 개입해 피의자들의 변호인이 사건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일을 '정의의 구현'이라고 믿고, 그 시도가 성공하면 집단적으로 자축하며 승리감을 만끽하는 이들은 트위터만 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앞으로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바로 이 대열에 황진미가 서 있다. 앞서의 인용글에서도 드러나듯이, 황진미는 의대생들의 변호인들이 줄줄이 사임하는 현실에 대해 별 문제의식이 없다. 복수의 변호사를 구성해 변호인단을 구성하는 피의자들의 법정전략을 '돈지랄'로 규정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황진미는 애시당초 해당 사건에 대한 변호 자체를 사갈시하고 있다. (이는 상당수의 '네티즌'이 공유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황진미가 '개념판사'로 기억하는 박재영 변호사는 여전히도 변호를 맡고 있다. 황진미는 이게 영 못마땅하다는 시각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낸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법률가가 성추행범(정확히는 성추행 용의자)의 변호를 맡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일이라면, 성추행보다 죄질이 나쁘다 할 수 있는 살인이나 강간을 변호하는 경우는 어떤가? 황진미의 논리를 연장하면, 그런 사건의 변호인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명단을 작성해 언론에 공개하고, 이들 모두에 대해 왜 그런 못된 놈을 변호하느냐고 성토라도 해야 할 게다. 나아가, 아예 강력 사건 피고인이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자체를 헌법에서 삭제하는 데까지 갈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헌법이 형사재판 피고인에게 변호인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게 된 건, 민주주의자들이 국가권력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며 따낸 성과라는 거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피해자의 변론권(소명권)을 보장하게 된 건 17세기 권리장전을 법제화하면서부터인데[각주 2], 이를 위해서는 무려 '혁명'이라는 방법까지 동원돼야 했다. 그런데 이로부터 400년이 지난 뒤 어느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시 역사의 흐름에 저항했던 왕과 같은 입장을 어느 '진보' 평론가가 개진하고 있다. 이 무슨 블랙코미디란 말인가.

참고로, 미국의 법조계에도 황진미와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변호사들은 형사 전문 변호사들(criminal defense lawyer)를 두고 '경찰이 나쁜 놈을 잡아오면 범인을 풀어주는 직업'이라 비난하며 경멸감을 표현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비난을 하는 변호사의 상당수는 기업 전문 변호사라는 것이다. 경제 권력이 탈세하고, 독점으로 시장경제의 건전성을 망치고, 노조를 탄압하고, 환경을 오염시킬 때 앞장서서 그들의 이익을 수호했던 사람들이 되려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우는 것이다.

과연 이게 수긍할 만한 일일까? 가령 김용철의 내부고발로 이건희와 삼성 간부들이 법정에 섰을 때, 그들을 변호했던 김앤장 변호사들이 박재영 변호사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사람들일까?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 전문 변호사들이 살인/강간/폭행 같은 형사사건 용의자들의 변호를 맡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이미 고액의 수임료를 축적해 굳이 그런 '지저분한' 사건들까지 변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법률시장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매출액 비중은 절반을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각주 3]. 따라서 기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변호사가 수임하기로 선택할 수 있는 사건의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남는 사건의 대다수는 형사사건일 게다. 즉, 변호사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살인범'과 '강간범'의 변호를 맡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그리고 앞서 논했듯 그건 잘못된 일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박재영 변호사가 아니다. 비난은 오히려 헌법상의 변호인 선임권을 무시하고, 사법적 판단을 인민재판의 영역에서 수행하려는 황진미에게 돌아가야 한다. 해당 사건을 수임했던 동료 변호사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자리를 지키고, 성실하게 변론 준비를 하는 박 변호사에게서 나는 '소신'과 '용기'를 본다. 내게 그는 여전히도 '개념' 변호인이다.


<P.S - 포스팅 이후 추가>

이 포스팅을 작성한 후 '황진미'라는 필명의 댓글이 달렸다. 사칭이 하도 많은 세상이기도 하고 글쓴이 본인이 이 누추한 블로그에까지 직접 방문했다는게 잘 믿기지 않아, 황진미 씨의 트위터를 확인했더니 위의 댓글과 같은 내용의 트윗을 발견했다. 따라서 본인이든 사칭이든 간에, 필명 '황진미'의 입장을 한겨레 기고자 황진미의 입장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진행해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다. 

황진미 씨는 필자가 자신이 주장한 논지를 '오인'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피고인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선 안된다고 쓰지 않았"으며, "변호사가 개념판사였음을 언급한 것은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어리둥절한 감정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좀 의외인 해명(혹은 반론)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댓글을 통해 이미 밝혔지만, 본문에서도 소개할 필요성을 느껴 여기에도 댓글의 내용을 싣는다.

시스루 2011/07/24 20:15
저로서는 황진미 씨가 서술한 내용이 박 변호사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어리둥절한 감정의 표현'이었다는 점이 되려 어리둥절하군요.

문제의 글에는 박 변호사에 대해 부산저축은행까지 거론해 가며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정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고 묘사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의대생들이 변호인단을 꾸리는 걸 '돈지랄'로 보는 '여론'에 대한 서술과 같은 문단에 들어 있지요. 저는 정상적인 독해력의 범위 내에서라면 황진미 씨의 표현을 냉소 내지 조롱이라고 읽는 게 자연스럽지, '본심을 이해하기 어려움'이라고 읽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정말로 후자를 의도하고 서술하신 거라면, 표현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한겨레 홈피의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보세요. 황진미 님께서 의대생들의 변호받을 권리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고 독해한 사람들은 많아도,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독자들의 반응이 이러하다면, 본인의 표현방식이 본래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한게 아닌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글쓰기로 먹고사는 분이시면, 본인의 글을 저처럼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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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한겨레의 다음 기사가 좋은 예라 하겠다. 한겨레뿐만 아니라,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기사로 다뤘다.
'성추행 고대 의대생' 거물급 변호인단 '눈총' - 한겨레

2. 1628년에 제정된 권리장전은 청교도혁명의 결과물인데, 4조에서 "신분이나 지위를 불문하고 어느 누구도 정당한 절차에 따라 답변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됨 없이, 토지 혹은 소유지에서 추방되거나 체포/구금되지 않으며, 상속권이 부인되거나 살해되지 않는다"는 조항(권리청원 4조)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연구소 홈페이지의 게시물; [인권연구_창]지금, 세계인권선언을 묻다(10)를 참조할 것.

3. 국내 로펌순위 5위(2009년 기준)인 법무법인 세종의 경우, 회사 매출액에서 기업에 대한 '자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60~70%에 이른다. 나머지는 소송 관련 업무인 '송무'에서 나오는 매출액인데, 소송의 의뢰인 중에서도 기업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출액중 기업 관련 업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높아질 것이다. 서울신문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