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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의원만 그런 게 아니야

정치부 기자들이 일반인으로부터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원수들처럼 싸우다가도 카메라만 꺼지면 '형님, 아우' 하며 사이좋게 지낸다는데 사실이냐?"라는 것이다. 


답변은 이런 기사처럼 대체로 비슷하다. "그럴 때가 종종 있다"는 것. 이것이 너무나 낯선 광경이었기에, 정치부에 발령받은 직후엔 나름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회고하는 기자들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세간의 흔한 해석은 표리부동이다. 애초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 여야 간에 죽일듯이 물어뜯고 싸우는 건 '쇼쇼쇼'에 불과하며, 사적으로 친한 기득권끼리의 적당한 나눠먹기가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냉소적 해석의 귀결은 자명하다. 역시 정치인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종자들이며, 그러하기에 신뢰해서는 안되는 부류라는 식의 결론이다. 정치혐오의 강화다.


과연 그럴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좀 다르게 본다. 정치인들만 그러는 게 아니고, 한국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양쪽 모두 직업전문인이거나 전문가, 특히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된 전쟁은 상호 존중과 규칙의 인정 또는 심지어 기사도까지 배제하지 않는다. 폭력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는 제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장 르누아르의 평화주의적 영화인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이 보여주듯이 양차 세계대전 때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서도 여전히 명백하게 나타났다. 정치와 외교의 전문직업인들은 유권자들의 표나 신문들의 요구에 구애받지 않을 때, 싸우러 나오기 전에 악수를 하고 싸우고 난 뒤 술을 마시는 권투선수처럼 상대편에 대해서 아무런 적의 없이 선전포고하거나 강화를 협상할 수 있다.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77페이지


홉스봄의 시야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사실 우리는 비슷한 광경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저 떠올리지를 못할 뿐이지. 예를 들어 유럽의 중세나 동아시아의 고대를 다룬 역사물(ex. 삼국지)에 등장하는 클리셰를 생각해 보자. 우리편 군사들의 목을 폭풍처럼 날려대는 적진의 장수를 앞에 두고 '적이지만 훌륭하군, 죽이기엔 아까워'라고 말하는 장군/기사 캐릭터, 어디선가 한두 번은 봤을 게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적군을 상대로도 그런 감상이 들 수 있는데, 기껏해야 의회에서 말로 싸우는 상대에게는 왜 그러지 못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