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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그 이상한 풍경, 알고 보니 미국산

캠퍼스 진보주의자들(liberals:인용자 주)이 개인적 정체성에 더 강하게 매달릴수록, 그들은 합리적인 정치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더 꺼리게 된다. 지난 10년 동안 새롭고 매우 의미심장한 어법 하나가 대학교들에서 주류 언론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X로서 말하는데(Speaking as an X…)'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발언자가 특권적인 지위에서 이 사안에 관하여 말한다는 점을 듣는 이에게 알린다. ("게이 아시아인으로서 말하는데, 나는 이 주제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라는 발언은 절대로 없다.) 이 표현은 정의상 비(非) X의 관점에서 유래한 질문들을 차단하는 장벽을 세운다. 그리고 의견 대립을 권력 관계로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논쟁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체성을 들먹이고 질문이 들어올 때 가장 강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이 항상 승자가 된다. 그리하여 과거라면 '나는 A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는 이러이러해.'라는 식으로 시작되었을 학급 토론이 지금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형태를 띤다.


…<중략>…그리하여 금기가 논쟁을 대체한다. 평균보다 더 특권적인 우리의 캠퍼스들은 때때로 태곳적 종교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특정 주제들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오직 승인된 정체성 지위를 가진 -샤먼들과도 같은-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특정 집단 -현재는 트랜스젠더 집단-은 일시적으로 토템에 준하는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숙청 의례에서 절차에 따라 지목되는 희생양들 -현재는 보수적 정치 논객들-로 캠퍼스가 넘쳐난다. 명제들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거나 불결하다고 판정된다. 명제 뿐 아니라 간단한 단어도 순결하거나 불결할 수 있다. 늘 이의를 제기하고 울타리를 넘는 급진주의자로 자부하는 좌파 정체성주의자들은 언어에 관해서만큼은 과묵한 개신교도 여선생처럼 되었다. 그들은 모든 대화에서 오만한 표현들을 찾아내고 부주의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사람들을 마치 옛날 선생들이 학생을 체벌하듯이 제재한다.


- 마크 릴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원제 'The once and future liberal', 2018, 93~95쪽

- 강조는 원문 그대로


몇 년 전 트위터를 하던 시절 겪은 황당한 경험이 있다. 동성애 이슈와 관련된 논쟁에 낀 적이 있었는데, 상대편으로부터 내 상식의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이슈에 대한 그의 입장이 아니라 태도였다. 미국에 사는 게이라고 알려진 그는 말했다. '나는 게이라서 동성애 문제에 대해 매우 잘 이해하지만, 너(를 포함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이성애자이니 이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입을 닥쳐라. 그것이 겸손한 태도다'라고.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진지했으며 자신에겐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닥치게 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엔 뭐 이런 희한한 또라이가 다 있나 생각했다.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면 발언할 자격 자체가 없다니 이 무슨 창조적 헛소리란 말인가. 그런 논리대로라면 총선에 출마해 본 사람 아니면 국회의원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사 해 본 적 없으면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되고, 사법고시 합격자 아니면 검찰이나 법원 욕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즉 세상 대부분의 영역)에 아예 의견을 내지 말라는 황당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세상사에 대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자신하는 이명박 같은 사람만 예외가 될 것이다. 이렇듯 머리를 몇 초만 굴리면 누구나 논파할 수 있는 수준의 멍청한 소리를 그리 진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퍽이나 쇼킹했다. 대체 얼마나 독특한 정신세계를 발달시켜야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혀를 찼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그의 사고방식은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되려 전형적인 것이었다. 앞서 인용한 책에 서술돼 있듯이 그와 동일한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집단이 이미 북아메리카 대륙에 형성되어 있었고, 그는 그 덩어리의 흔한 파편이었던 것이다. 문제의 황당한 사고방식은 한반도의 주민인 내게는 그야말로 기괴한 것이었지만, 그의 세계(미국의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무언가였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그 동네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몇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제 저런 사고방식을 체화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이들 중 저런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찾는 건, 된장찌개에서 두부 조각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쉬워졌다. 요약하면 대강 이러한 주장이다. '여성이 처한 현실은 오직(!) 여성만이 온전히 파악할 수 있으며, (기득권자인) 남성들은 애초에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여성이 성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무언가를 주장하면 너희가 할 일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사고방식의 내용에서 '게이'란 단어만 '여성'으로 바꾼 버전이다. 여하간에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이성이나 토론이 아니라 출신이라는 이야기 되겠다.


이런 황당한 사고방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한국은 심하게 미국화된 나라이며, 미국을 베끼는 걸 '선진화'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휩쓴 사회적 현상이 몇 년만 지나면 한국에 그대로 수입되는 경우가 숱하다. 미국을 베끼는 데는 진보와 보수도 따로 없다. 한국의 대표적 보수인 전경련이 미국의 보수 레이건('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다')을 베껴 시장만능주의의 전도사를 자임하듯이, 한국의 진보는 미국의 리버럴을 베껴서 담론과 정책을 만든다. 베껴서 수입하다 보면 괜찮은 것만 국경을 넘어오는 게 아니라 뻘짓도 같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미국 민주당 리버럴의 주류 노선으로 자리잡은 이른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굳어지는 심증이 하나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는 페미니즘이 보여주는 퇴행들(ex: 여론재판, 사람들 겁주기, 사회적 검열 등)이 실은 대단히 미국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게 한국에서 새로이 생겨난 경향이 아니라, 영미권에서 이미 나타난 현상의 반복과 답습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계속 보고 있다. 문제는 '선진국화=미국화'라고 인식하는 국내 지식인층의 오래된 습관 때문에, 한국 페미니즘의 미국 따라하기를 '바람직한 사회적 변화'라고 간주하는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사회적 쟁점이 되는 페미니스트들의 시위나 활동을 언론이 보도할 때,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비교하겠다며 미국이나 캐나다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이제 클리셰가 되었다. 결론은 한결같다. '그 나라에선 더하더라. 그러니 한국의 페미니스트 정도면 마일드한 편이고,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이 흐름을 깨려면, 미국의 리버럴이 정체성 정치를 한답시고 만들어 놓은 사회적 변화가 얼마나 퇴행적이었는지를 알리는 데서부터 문제를 풀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진보진영의 지식인과 영향력 있는 인사들 사이에 그 실상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를 위한 평등을 이야기하는 대신, 흑인/여성/성소수자 등의 '권리 옹호'에 집중하며 그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인종주의자'나 '여성혐오자'로 낙인찍는 미국 민주당식 정치의 결과가 얼마나 자멸적이었는지를 똑바로 인식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미국 민주당의 길은 한국의 진보가 따라갈 모델이 아니며, 그들을 베끼다가는 시원하게 망한다는 점을 말이다. 미국판 '프로불편러'라 할 수 있는 소셜 저스티스 워리어(Social Justice Warrior)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그 나라 진보파를 싫어하게 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런 짓을 하면 사람들이 '진보'를 싫어하게 되며,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대중적 거부야말로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미국 정체성 정치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 글 서두에 소개한 책은 상당히 유용한 도구다.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번역된 제목이 촌스러워서 그렇지, 내용은 깔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