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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상식의 승리를 환호하며



오늘만큼은 승리감에 젖어도 괜찮다.

안다. 전면적 무상급식이 예정대로 실시된다고 해 봐야 그저 현상유지에 불과하다는 걸. 작년 지방선거 직후에 실시됐어야 할 정책이 1년 2개월이나 밀린 뒤에야 비로소 집행되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이미 현실이 된 정책을 서울이 뒤늦게 쫓아가게 됐을 뿐이다. 겨우 이 정도를 위해 182억원이나 되는 투표비용을 낭비하고, 무상급식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여러 사안들을 공론의 장에 올릴 기회를 잃었다. 오늘의 결과는 기껏해야 '의무방어전'의 승리 정도밖에 안 된다고 평가할 이유가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의 승리를 기념하고 즐기련다. 단순히 무상급식 전면 실시가 보장됐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식이 반칙을 눌렀다는 점이다.
 
사실 전면적 무상급식을 실시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일개 정책에 대한 결정에 불과하다. 각 시민이 자신이 보기에 합당하다고 보는 입장을 선택하고, 그 중 다수의 정치적 의사를 따라 정책 방향이 결정되면 될 뿐이다. 이건 여러 정책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일 뿐이라, 승리나 패배를 논하는 것 자체가 별로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명박과 오세훈의 무리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권력을 동원하며 '반칙'을 자행한 결과, 사태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들의 반칙은 도저히 그냥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국가기관이 투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법률을 대놓고 무시했다. 군이 서울 출신 사병들에게 외출을 허가해 주는 대신 투표한 후 확인증을 가져오라 지시했다는 제보가 빗발쳤다(링크). 투표를 중립적으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오세훈은 무려 서울시장직을 걸고 투표를 호소하면서 자신의 직무를 배반했다. 금융위원회는 22개 산하기관에 사실상 투표를 종용하는 공문을 보냈다(링크). 이명박 장로의 든든한 우군인 대형교회 목사들은 선거법을 아예 무시하고 '직위를 이용해' 노골적으로 투표를 선동했다. 압권은 이들 모두에 대해(교회 몇개는 제외) 선관위가 면죄부를 발급해 줬다는 것이다. 결국 게임은 규칙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룰을 어긴 사람들은 심지어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폭력이 동원되기도 했다. 유명한 극우단체 어버이연합은 오세훈 시장 주민소환을 받는 사람들에게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를 가했다.(링크) 투표 거부 캠페인을 벌이던 운동원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도주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기도 했다 한다.(링크) 최근 이런 백색테러는 거의 일상이 되고 있는데, 그 핵심 배경으로 경찰의 수수방관이 꼽힌다는 점이 중요하다. 

언론은 이런 현실을 가렸다. 정권에 장악된지 오래인 방송과 연합뉴스, 그리고 동맹군인 조중동은 위에서 언급한 반칙들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사소한' 사안의 조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투표거부=반민주주의'라는 한나라당의 프로파간다를 확산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다. 투표거부가 시민의 권리라는 사실(이 글 참조)을 무시한 건 '견해 차이'라고 넘어갈 수 있다 치자. 그런데 그들의 보도에서는, 정작 자신들에게 불리한 주민투표가 시행됐을 때 투표 보이콧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던 한나라당의 '과거'(링크)가 언급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늘상 그랬던 것처럼, 정권에 불리한 이런 류의 정보들은 트위터 같은 SNS, 혹은 비주류 언론들에서나 유통될 뿐이었다. 요컨대, 이번 주민투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은 MB정권 성립 이후 벌어진 사회적 퇴행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장과도 같았다. 
 

<2008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 김태환 제주도지사의 트위터 캡쳐사진. 출처는 뷰스앤뉴스>

지난 4년간은 이런 퇴행적 변화가 놀라울 정도로 쉽게 안착하는 과정이었다. 야당이 너무 무기력했던 탓에 저항의 구심점이 생기지 않았던 탓일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권이 갖고 있는 모든 권력자원을 동원해 더티플레이를 했는데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몰상식에 맞서는 상식인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뜻일 게다. 그 힘이 더 강해져 저들로부터 의회권력을 탈환하고 행정권력을 찾아오는 날, 우리는 반칙을 저지른 책임자들을 심판대에 세울 필요가 있다. 이건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다. 권력을 남용하면 처벌을 받고, 규칙을 어기면 대가가 따른다는 상식이 회복되지 않으면 같은 일이 언제까지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늘은 상식의 회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의 첫 돌을 놓은 날이다. 그러니 마음껏 샴페인을 터뜨리고 환호하련다. 이 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