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그것이 알고 싶다’ 일베 편이 놓친 것들

1.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는 어제(5월 3일) 방영분은 악명 높은 커뮤니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를 다뤘다. 사회적으로 나름 뜨거운 관심을 받는 아이템이기에 기대하며 봤지만 실망스러운 방송이었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핥기만 했다는 인상이었다.


성의 없이 대충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인터뷰도 많이 하고 조사도 열심히 해서 자료를 많이 긁어모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좋은 방송이 아니었다. 자료들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에러가 났다. 달리 말해 총론이 매우 부실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일단 그것이 알고싶다 팀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날 방영분의 편집이 유기성이 좀 떨어져서 중심 논지가 뚜렷하지 않은 감은 좀 있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장덕진 서울대 교수 인터뷰 등을 통해) 일베를 일종의 ‘루저’ 집단으로 묘사했다. 386 이상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낙오된, 경제적/사회적으로 소외된 젊은 세대의 일부가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공통의 적’을 찾아서 공격한다는 식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 하는데, 표현의 자극성이 커질수록 호응을 많이 받기에 표현물의 수위를 높인 결과, 외부 사람들이 학을 떼는 자극적이고 멸시적인 표현들이 난무하는 지금의 일베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일베의 정치 성향이 민주당과 노무현에 대한 증오를 토대로 하고 있다며, 이것이 호남에 대한 멸시와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같이 담았다. 마지막으로, 일베 같은 보수파들이 젊은 세대 전체의 진보적 성향에서 보면 소수파에 해당하는데, 언론이 그 존재를 띄우는 바람에 과대하게 부각된 것이라는 진단을 곁들였다. 



2. 

문제는 이런 식의 분석이 대체로 틀렸거나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일베를 논하려면 일단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와는 구별되는 일베만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찾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일베만 갖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분리해 내고 그게 왜 문제인지를 짚어야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여기서 실패했다


일단 일베를 루저 집단으로 볼만한 실증적인 근거가 없다. 이날 방영분에도 서울대 졸업해서 대기업을 다니거나, 노무사로 재직하는 일베 유저들이 등장한다. 이런 표본들을 소개해 놓고, 살벌한 경쟁 사회가 낙오자를 만들어 일베 현상을 낳았다고 설명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베에서 한때 벌어졌던 ‘학력인증놀이’에 이른바 ‘명문대’라 평가받는 대학의 학생들이 상당수 참여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일베 문제의 핵심은 이용자의 계급적 위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간주하는 해석이 되려 타당해 보인다. 


삶이 어려워져 박탈감을 느낀 집단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하는 것이 일베 현상의 원인이라 짚은 대목도 공허하다. 이것은 일베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갈등을 본질로 하는 ‘정치’를 논하는 집단이라면 대부분 갖는 특징에 가깝다. 예컨대 야당 성향 유저가 강세인 트위터를 보자. 20대의 어려운 삶을 호소하며 원인을 제공한 적을 만들어 공격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대상이 박근혜와 새누리당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을 쏟아내는 소위 ‘네임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베에 비해 빈도와 강도 면에서 덜하긴 하지만, 이쪽도 공격적인 표현이 더 호응받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건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기성세대가 정글로 만들어 버린 사회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 중 누구는 여당을 적으로 지목하고 박근혜를 공격하며, 누구는 여성이나 이주노동자 혹은 전라도를 공격한다. 일베는 왜 하필 후자의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왜 후자만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어제 방송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별로 없었다. 



3. 

일베가 다른 사이트와는 달리 사회악이라고 평가받는 건, 혐오 발언(hate speech) 때문이다.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을 동원해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일베 문제의 핵심이다. 이걸 짚지 않고 무슨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할까.


민주주의 사회라면 5.18을 ‘폭동’이라 생각할 자유도, 노무현이 나라를 망쳤다 생각하고 미워할 자유도 보장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여성을 ‘보지’라고 부르는 것을 일상화하고, 호남인을 ‘홍어’라 부르며 전부 솎아내자 말하는 건 다르다. 역사적 사건이나 권력에 대한 평가와,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격은 다르게 취급되어야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언어의 수위가 도를 넘으면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표현에 위협(!)을 느끼는 당사자가 존재하며, 사회는 이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베의 유저와 운영자들이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해 방패로 내거는 ‘표현의 자유’는 아무 표현이나 모두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례로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제시한 사례, 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거짓말을 외쳐서 공포상태를 불러오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 놈 때문에 사람이 죽고 다치는 위험이 생겨나는데, ‘표현의 자유’로 면책해야 한다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시민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사회에서는 시민이 얼마나 현명한 리더를 뽑느냐에 따라 사회의 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권력자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시민에게 전달돼야 하며, 그러려면 권력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유통하는 사람을 멋대로 처벌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것이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혐오 발언은 애초에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려던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마이너리티 집단에 위협을 가하는 반사회적 행위일 뿐이다. 이런 것을 보호하면 곤란하다. 


요컨대, 일베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방송이라면 일베가 양산하는 혐오 발언들에 비판의 핵심을 뒀어야 했다.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영역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 그 선을 넘은 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논하는 것이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겠지만, 어제 방송에선 그런 것이 없었다. 핵심을 외면하니 ‘결국 사회와 언론이 문제’ 같은 피상적인 결론만 나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일베가 노무현과 민주당을 싫어하더라는 뻔한 결론의 연결망 분석으로 귀중한 방송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혐오 발언이 갖는 문제점을 말해야 했다. 어디까지가 혐오 발언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알려야 했고, 법으로 규제해야 할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다뤘어야 했다.


특히나 일베 운영진의 문제를 전혀 짚지 않았다는 대목이 실망스럽다. 그자들은 자기가 책임지는 공간에 혐오 발언이 넘쳐나는데도 방관하는 자들이며, 혐오 발언을 퍼뜨리는 데 효과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공범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왜 이들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던 것일까?



4. 

일베를 대다수 정상인으로부터 이탈한 ‘예외적인 소수’로 치부하는 시선도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이날 방영분은 이원재 카이스트 교수 등 3명을 인용하며, 40대 이하 인터넷 사용자들 전체로 봤을 때 보수는 소수이고 진보가 압도적임을 강조했다. 별 것도 아닌 집단인데 언론이나 정치 세력이 과분한 관심을 주는 바람에 일베가 크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뉘앙스였다. 


잘못된 관점이 잘못된 진단을 낳는 고전적인 사례다. 일베라는 현상을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당연히 위와 같은 결론이 나겠지만, 일베가 의미하는 것을 인종주의에 기반한 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과 증오라고 본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건 단순히 일베 이용자에 국한된 행동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요즘 아이들'의 언어를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애자’라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욕으로 쓰는지 알고 있을 게다. ‘병신’ 등의 단어가 모멸감을 준다는 이유에서 대안적인 표현으로 개발한 ‘장애자’를 줄인 표현이다. 그런데 단어는 바꿨어도 차별이 왜 나쁜 것인지, 혐오 발언이 얼마나 큰일날 짓인지를 가르치지 않으니 그 단어조차 다시 멸칭으로 바뀐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인권 감수성의 수준은 이 정도로 형편없다. 


한국 사회의 문제 중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보호해야 할 가치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반면에,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격적이고 차별적인 발언들은 별다른 제지 없이 일상을 누빈다. ‘다문화’,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 같은 단어들이 ‘애자’와 마찬가지 용도로 쓰일 때, 아이들의 인식을 교정하기 위해 학교 당국이 뭔가를 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운이 좋아 인권 감수성이 높은 교사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때야 비로소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길러진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됐을 때 ‘일베충’이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 장애인을 함부로 대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던 사람이, 차별과 멸시의 영역을 지역이나 성별로 넓혔다고 해서 그게 그리 대단한 변화일까? 이런 의미에서의 ‘일베’는 일베 사이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호모’에 대한 경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숱한 한국인들 사이에 있으며, 박근혜를 욕하기 위해 성차별적인 언사를 동원하는 야당 지지자들 사이에도 있다. 이를 모두 무시하고 ‘일베충’만이 문제의 전부라고 간주하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문제의 해결은 멀어질 뿐이다. 일베가 창궐하는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시야를 넓혀야 한다. 차별과 혐오 발언이 일상이 된 사회가 일베 문제의 본질이며 일베충은 그 극단화된 버전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는 ‘새끼 일베’들을 막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5. 

미국 대학에 있던 시절, 수강하는 모든 과목의 강의계획서에 '성/인종/장애 등에 근거한 차별적 발언을 하면 수업에서 추방'이라 적힌 걸 보고 멍해졌더랬다. 이런 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싶었던 당시의 충격이 일베를 보고 있으면 자꾸 떠오른다.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닌데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 왔던 것이다. 


이런 기사저런 기사가 묘사하고 있는 한심한 학교 현장부터 바꿔야 한다. 교사들의 인권 감수성 연수를 빡세게 돌리고, 아이들에게 차별이 얼마나 나쁜 것이며 큰일인지를 진지하게 가르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공교육의 우선적인 목표가 되게끔 해야 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세계에서도 같은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사람취급하지 않는 기업에겐 징벌적 배상금을 물린다거나, 비정규직에게 차별적인 언동이나 행위를 하는 임원이 적발되면 법/인사/금전으로 가혹하리만큼 책임을 묻는 식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성별/인종/경제력/지역/성적 지향/나이/학벌 등을 근거로 하는 모든 부당한 차별과 혐오가 용납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시도들은 그래서 소중하다. 동성애를 차별하지 말라는 조항을 만들겠다는데, 차별을 해야 아이들이 동성애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종교 괴물들을 보라. 이런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현실만큼 해당 조례의 필요성을 웅변하는 근거도 없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일상의 혐오와 차별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시도들이 등장할 때, 건전한 시민은 이를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하고 지켜내려는 지원사격을 해야 한다. ‘건전한’이란 단어가 부담스럽다고? 그럼 ‘일베를 원하지 않는’이라고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