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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혹은 잡상

당신의 말, 존중받고 있습니까?

1. 

"TV에 몇 사람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데, 단 몇 분 동안 "개인적으로"란 말이 열 번도 넘게 나오더라고요. 이 말을 빼면 문제가 있는 건가요." -twitter에서, @V**[각주:1]


TV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표현할 때 '개인적인 의견'임을 자주 강조한다. 그런데 이건 군더더기 표현이다. 본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럼 본인 생각이지 누구 생각이겠나. "개인적으로"를 들어내도 문장이 성립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며, 그 편이 더 깔끔하다. 그런데도 습관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아주 많다.


'개인적으로'를 꼭 써야 하는 상황이 있긴 하다. 자기 의견이되 본인이 속한 조직의 입장은 아닐 때가 그렇다. 정당의 대변인이 "이건 사견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가 아닐 때 갖다 붙인다면, 자신이 뭔가 위축된 상태에서 말을 꺼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이 쓸데없이 "개인적으로"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잦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어떤 특징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웬만하면 안 하는 게 좋은 짓'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단면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정도가 그만큼 낮다는 의미다


한국은 헌법으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지만, 법전상의 권리를 생활세계에서 충분히 누리는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일국의 언론사가 누리는 자유가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할 때 '최고 통치자(대통령)를 얼마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가'를 종종 기준삼곤 한다. 같은 기준을 직장 등의 생활세계에 적용해 보자. 예컨대 대기업 직원이라면, 회사 인트라넷에 "회장님이 이러시면 안 되는데 말이야"라고 쓸 수 있는 강심장을 주변에서 얼마나 봤는지 생각해 보면 되겠다.


학교의 교무회의나 직장의 각종 회의 풍경은,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나라의 현실이 실제로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지표다. 어쩌다 운이 좋아 얻어걸린 리버럴한 리더가 작정하고 문화를 바꿔버린 소수의 조직들을 제외하면, 풍경은 대체로 비슷하다. 상급자는 말하고 하급자는 듣는 것. 모여서(會) 의논하는(議) 자리란 건 말뿐이지, 실제로는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지시와 방침을 전달하는 자리다. 이런 체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의견을 말할 권리는 힘 있는 사람이나 '높으신 분'에게나 있는 것이지, 자신 같은 사람들이 언제나 접근 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의견을 내놓는다는 것은 뭔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며, 눈치 없이 소신을 꺼냈다간 고립되거나 손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어쩌다 의견을 말할 때 '개인적인 의견'임을 강조하며 방패부터 내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 회의 문화의 상징이자 끝판왕 되겠다. 무려 '국무위원'이나 되는 분들 중에도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받아쓸뿐. // 2013.04.09 청와대 사진기자단



2. 

한국인이 직장과 같은 일상세계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몇 가지 답이 있겠지만 현실에서 작동하는 케이스 중 하나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통념과는 달리 노조라는 조직의 핵심 효용은 단순히 '더 많은 월급'을 받게 해준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노조를 경험해 본 사람들 중, 경제적인 효용보다 심리적 효용과 같은 비경제적 효용이 더 와 닿았다고 회고하는 이들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저 높은 상급자에게도 감히 말할 수 있게 되며, 문제와 불합리를 발견했을 때 "고쳐 달라"고 말하면 수용이 된다. 아닌 경우에도 일단 진지하게 들어는 준다. 이러한 것들이 실로 어마어마한 변화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감정은 종종 '해방감'과 같은 언어로 표현된다


조직으로 얻어낸 언론의 자유는 실질적인 힘을 불러온다. 직원 개인의 고위 관리직에 대한 개별적 호소와, 집단으로 조직된 '공통된 입장'은 다른 취급을 받는다. 전자와는 달리, 관리자나 고용자는 후자를 간단히 무시하지 못한다. 후폭풍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조의 힘이 세지면 상급자가 하급자들의 눈치를 보는 일도 생겨난다. 노조가 생기면 사용자들이 비싼 돈으로 '노조 파괴 전문 업체'를 고용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어떻게든 와해시키려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 입장에선 단순히 돈 몇 푼 더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만히 두었다간, 일종의 왕국과 같은 공간에서 왕처럼 누리던 권력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안다.


어지간한 전문직 업계가 아닌 이상 찾아보기 힘든, 상급자가 하급자들의 눈치를 보는 희귀한 경험을 직접 해 본 사람들은 노조의 필요성을 몸으로 절감하게 된다. 굵직한 사업장의 노조 위원장 선거 투표율이 웬만해선 70%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며 90%를 넘는 경우도 잦은 이유가 이것이다. 조합원의 관심이 총선이나 지방선거 정도는 가볍게 웃돌 정도로 높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노조 조직률이 9~10%에 불과한 사회이기 때문에(그나마도 ‘어용’이라 불리는 한국노총 소속이 절반이다), 이처럼 자유로이 말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한줌에 불과하다. 나머지 그룹의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용히 산다. 기껏해야 퇴근 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하고,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면서 '세상에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구나'를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한다. 인간이 덜 된 상사의 뒷담화를 하고, 정권이 왜 이 모양인지를 같이 씹으면서 동질감을 느끼지만, 내일 출근하는 나를 맞이하는 것은 다시 그 답답한 환경이다.


대다수의 생활인들이 '조직적 힘'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사는 사회가 지불하는 비용은, 단순히 구성원들의 '답답함'에 그치지 않는다. 말을 해봐야 무시하면 그만인 사회에선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위험에 처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세월호를 보면 된다. 배가 위험하며 그대로 운항하단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선원들의 보고가 사고 이전부터 잇따랐다. 그러나 바뀐 것이 없었다. 회사 고위층이 선원들 의견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선원들의 ‘말’은 말로 취급되지 않았고, 그들은 회사를 강제할 만한 힘이 없었다. 현장의 위험을 눈앞에서 매일같이 보면서도 정작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기력감을 느낀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아예 회사를 나오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그를 살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있을까. 개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관철해줄 조직이 없어서 힘의 균형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려면 때로는 이탈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도생을 도모하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의 풍경이다.


3.

세월호 참사를 겪고 '이게 나라냐'며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이 모양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답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중간 조직(노조, 정당, 시민단체 등)의 확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뜬금없이 웬 민주주의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대통령과 국회의원, 혹은 시장이나 군수를 선거로 뽑는 것' 정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1987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 27년이 흘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당시와 비교해 그리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국경을 벗어나 보면, 결코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예컨대 인사나 채용과 같은 기업경영에 노조 대표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아예 기업 이사진 중 1/3 ~ 1/2를 직원들 몫으로 할당하는 독일인들이 누리는 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주택의 월세를 놓고 집주인과 세입자가 개별적으로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세입자들이 가입한 조합이 집주인들의 조직과 협상해 결정하기에 집주인이 마음대로 월세를 못 올리는 스웨덴 같은 나라의 민주주의는 우리의 그것과는 이름만 같지 실체가 다르다. 


CEO를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을 뽑는데 '김 대리'나 '박 계장'의 의사가 반영되는 기업에선, 멀쩡한 정규직을 해고하고 비정규직으로 대체한 뒤 똑같은 일을 시키는 식의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한다. 이런 기업에서는 직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객선의 만성화된 과적이나 안전교육 부족 같은 문제를 해결하라 요구하면, 수용될 확률이 높다. 한국 사회에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들이어야 한다. 여론이 안 좋을 때 정권이 검찰이나 공정위 등을 동원해 재벌을 때려주는 시늉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중간 조직의 형성과 권한 확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구조 개혁으로 경제민주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4. 

정치학자 박상훈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세월호 관련 칼럼을 통해 중간 집단이 기능하지 않는 사회가 얼마나 기괴해질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어떻게 '체제'와 '피해자'가 이토록 무매개적이고 원초적으로 대면할 수가 있느냐"고 그는 묻는다. 유족들 중에는 교회 신자나 노조원, 교사, 정당 당원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교사단체도 노동조합도 시민단체도 종교단체도 정당도 지방자치단체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국가와 피해자가 직접 마주 서야 하고 원망이든 기대든 분노든 모두 국가의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에게는 몹시 황당하다. 어떤 중간 조직도 국가와 유가족 사이를 매개하지 못한 결과, 여기가 과연 문명 국가가 맞긴 한지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은 현재 '외상 후(後) 스트레스 증후군'에 속하지 않는다. 외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외상은 진행 중이다. 아이 시신도 못 찾았고 범죄자 격인 해경을 매일같이 범정부 사고대책위 자격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나 소위 '제3자'의 개입을 뭔가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순수한' 당사자들끼리의 해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한국 사람들에게 박상훈 같은 의견은 낯설고 생소한 것에 불과하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원고에서 상담하던 아이들을 돕기 위해 내려갔다가 부탁을 받고 유가족 대표 역할을 떠맡았던 송정근 목사가 겪은 곤경은, 이 잘못된 인식이 얼마나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알고 보니 유가족도 아니며 심지어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공공의 적이 됐다. 아이들이 자신의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멀쩡한 사람 하나가 '불순한 의도로 유가족을 이용하는 악당'이 된 것이다. 그가 분노의 쓰나미를 맞고 떠내려가자, 그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며 납작 엎드려 있던 야당이 돌연히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신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영구제명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정부를 상대해야 할 짐은 그렇게 유가족 본인들의 몫으로 떠넘겨졌고, 결과는 참혹했다. 유가족은 아이를 잃어버린 고통을 수습하기도 힘든 마당에, 속터지게 하는 공무원들과 기자들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쌓인 분노와 불안감은, 대통령이나 총리 혹은 TV 카메라를 보면 고성을 지르고 욕설을 하며 물병을 던지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아니면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이런 상황을 만든 '국민' 중 일부는 화면을 보고 "미개한 사람들"이라며 혀를 찼다. 묻고 싶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 걸까?


세월호 가족들이 떠안아야 했던 불필요한 고통들을 다른 누군가가 다시 겪지 않게 하려면, 중간 조직을 고깝게 보는 게 아니라 그 필요성을 긍정하는 쪽으로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이 조직들이 결성과 운영에서 탄압을 받지 않게 하고, 좀 더 확대된 역할을 수행케 하는 방향으로의 제도적 정비도 필요하다.


여당 대신 국정원으로 통치하는 사람이 대통령이고, 민주주의 원리가 그나마 작동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인 정치를 축소하는 것을 '새정치'라 부르는 사람이 제1야당 대표인 현실은, 이런 기획이 실현되기가 결코 녹록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정당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나라에서, 중간 조직에 근거한 민주주의의 확대로 문제를 풀자는 기획이 힘을 받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의식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대로는 답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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